[일문일답] 자신을 내어준 프랑스 트레브의 영웅 아르노 벨트람 중령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월 23일 금요일 프랑스 남부 소도시 카르카손느와 트레브 지역에서 발생한 테러로 희생된 이들에게 애도를 표하는 전보를 보내면서, 특별히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준 아르노 벨트람(Arnaud Beltrame) 중령의 관대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찬사를 보냈다. 아르노 벨트람은 트레브의 한 슈퍼마켓에서 발생한 테러범 인질극 당시 민간인 인질을 대신해 인질을 자청했다 부상을 입고 다음날 오전 숨을 거뒀다.

신앙 실천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르노 벨트람은 10년 전 약혼녀 마리엘르(Marielle)와의 혼인성사를 준비할 때 참된 의미에서 회심했다. 아르노 벨트람의 희생적 행위와 관련해 오늘날의 희생과 자기 증여의 의미에 대해 프랑스의 젊은 가톨릭 철학자 막땅 스테펑스(Martin Steffens)의 말을 들어봤다.

 

“저는 희생이 존중을 수반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를 자문하게 만드는 그 사건 앞에 우리는 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존중을 부과합니다. 희생은 그 자체로 흥미롭고 역설적인 어떤 것을 포함하며, 결국에는 그 어떤 윤리도 희생을 부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윤리도 ‘당신이 희생하시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희생은 자유롭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 하지만 동시에 모든 윤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을 존재케 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각자의 능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 희생이란 윤리적으로 미리 규정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부과되며, 동시에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만, 모든 윤리의 원천 자체를 가리키는, 탁월하게 윤리적인 행위입니다. 이는 생명에 대한 넘쳐흐르는 사랑,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랑인 것이지요.”

벨트람의 희생에 대해 말하자면, 테러범의 공격이라는 아주 특이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이 희생의 의미가 살해자가 했던 그 행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만큼 더욱 큰 힘을 얻는 것입니까?

“정확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지요. 희생이란 살인의 전도된 대칭입니다. 한편에는 생명을 빼앗는 사람이 있고, 다른 편에는 오히려 자기 생명을 내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희생을 악(惡)의 사악한 어리석음에 반대되는 ‘선(善)의 폭력’ 혹은 ‘사랑의 폭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수난에서 태어나는 전략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과 선이 희생을 통해 악에 대한 최후의 말을 보존하기 때문이지요. 수난에서는 악이 하느님의 아들에게 폭발하며, 그분은 악의 타격에 내맡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공격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증언이지요. 벨트람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악의 사악한 어리석음이 우세한 것처럼, 비록 그 힘에 압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악에 속하지 않는 해결책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선의 전략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아르노 벨트람의 영웅적이고 거룩한 행동을 확실히 기억하게 됩니다.”

자기를 내어 주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개념일까요?

“멋진 질문입니다. (…) 우리가 그 개념을 잃어버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곧, 세상은 우리가 행하는 비밀스럽고 내밀한 모든 평범한 희생 덕분에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임신하고 출산을 기다리는 어머니 대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상당 부분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아기들이 존재하려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이 미친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세상이 계속해서 아기들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희생이 세상을 지탱하는 하나의 계속적이고 평범한 기초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일부 눈에 띄는 두드러진 희생들이 있습니다만, 만일 그것들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면, 짐작건대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가 기대고 있는 공통된 바탕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의지하고 있기에 땅을 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땅은 거기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은 분명히 거기 있지만, 대체로 인식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공포(orrore)와 영예로움(onore)이 서로 겹치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가르침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결단을 가지고 악에 대응하지 결코 악의 무기를 들고 악에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50년 전에 죽은 마틴 루터 킹과 20세기의 다른 모든 인물들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20세기는 기술이 가속화한 시대로 보이겠지만, 또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악 안에서 공포가 가속화된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좋지 않은 응답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악을 악으로 대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의 응답이 지닌 힘이 있는데, 그것은 ‘철저함’입니다. ‘내 문제야. 세상을 아프게 하는 악은 바로 내 문제’라고 말하며 일어서는 사람의 폭력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일어나지만, 같은 악의 무기를 들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선이 스스로 악이 되지 않고, 어떻게 악에 대응할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희생을 실천한 이 모든 인물들이 종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폭력의 자리에 생명을 닮은 그 무엇을 만들어내는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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